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카이도 옹립구상 (문단 편집) === 전개 === 1984년 10월 26일, 스즈키는 뜬금없이 다나카의 집을 방문했다. 총재 선거를 앞둔 시점이라 그 행보가 예사롭지는 않았는데 이때 스즈키가 다나카에게 제안한 것은 '''다나카파의 2인자인 니카이도 스스무를 총재로 옹립하자'''라는 것이었다. 사실 다나카파 구성원들은 말은 안해도 다나카에게 못내 서운한 점이 있었는데 다나카가 자기 파벌에서는 총리를 내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다나카가 '''다시 총리가 되고 싶은''' 욕심에다가, 만일 자기 파벌에서 총리가 나올 경우 자신의 파벌 장악력이 무너질 것을 염려한 것이 매우 컸다. 이 때문에 다나카는 총리 복귀의 야심을 버리지 않은 채, 차세대 주자로 거론되던 [[다케시타 노보루]] 등 소위 뉴리더 그룹을 적당히 다독이면서 배후에서 자민당을 주무르고 있었다. 스즈키가 노린 점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다나카파의 2인자인 니카이도 스스무를 총재로 내세워 나카소네의 재선을 막고 동시에 다나카파를 분열시켜 종래에는 다나카를 몰락시키려는 계산이었다. 2인자가 총리가 되면 다나카도 다시 총리하겠다고 나서기는 힘들 것이고 총리 출신 2인자가 자신의 독자 파벌을 만들게 되면 다나카파는 자연스럽게 분열 수준을 밟게 될 터였다. 그렇게 되면 당내 최대 계파인 다나카파가 둘로 쪼개지고 스즈키는 자신 파벌의 2인자인 [[미야자와 기이치]]를 내세워서 그를 총리에 앉힌 뒤 다나카처럼 뒤에서 권력을 휘두려는 생각이었다. 스즈키는 치밀하게 다나카의 최대 정적인 [[후쿠다 다케오]]와 [[미키 다케오]] 전 총리를 포섭하고 국가수반 지명투표를 대비해 야당인 [[공명당]]과 [[일본사회당(1945년)#s-6|민사당]]까지 끌어들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는데 스즈키의 수를 읽은 다나카가 이 제안에 결사적으로 반대한데다 다케시타 노보루의 후견인인 [[가네마루 신]]도 이를 반대했고, 원래 나카소네에게 반감을 가졌던 고모토 토시오가 다케시타의 입장에 동조하면서 미키파를 억제해버린데다 결정적으로 뉴리더들, 즉 후쿠다파의 [[아베 신타로]]([[아베 신조]]의 아버지) 스즈키파의 미야자와 기이치도 이 구상에 신중론을 주장한 탓이었다. 거기에 이 구상이 '''신문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만천하에 까발려진 탓에 더이상 진행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 결국 11월의 총재 선거에서 후쿠다 다케오와 니카이도 스스무는 나카소네의 일방적인 당 운영 등을 질타하고, 나카소네는 앞으로 당의 화합을 위해 힘쓰겠으니 한번만 도와달라고 읍소한 덕에 간신히 총재 재임에 성공할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